[안아브라함신부] 사순 제4주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사순 제4주일

여호수아기 5,9ㄱㄴ.10-12
코린토 2서 5,17-21
루카복음 15,1-3.11ㄴ-32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2010년 3월 14일 일요일



사순 제4주일

여호수아기 5,9ㄱㄴ.10-12
코린토 2서 5,17-21
루카복음 15,1-3.11ㄴ-32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여러분, ‘가시나무새’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에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 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물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

원래는 ‘시인과 촌장’의 하 덕규님의 곡인데 가수 조 성모가 리메이크해서 유명해졌습니다. 하 덕규님은 개신교의 집사로, 원래는 복음성가로 작곡한 것이라고 합니다.

가사의 첫 부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아마도 가사를 지은 이는 우리 마음 안에서 생겨나는 여러 욕망들, 그로 인해 생겨나는 갈등과 변화에 대해 표현하려 했나 봅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상반되는 마음이 있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저 사람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이 있고,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저 사람을 도와야지 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저 사람이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 그 아들을 용서하며 받아주는 아버지, 돌아온 동생을 받아주지 못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아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가리키는 부류의 사람은 명확합니다. 재산을 탕진한 아들은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비판을 받던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죄인의 회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설정된 인물입니다. 큰아들은 율법과 계율을 충실히 지키면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비판하던 율사와 바리사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작은아들, 큰아들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여기시는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며 큰아들에게 한 아버지의 말은 이를 말해줍니다.

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한결 같은 사랑! 탕자의 비유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 삶을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삶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큰아들의 삶과 작은아들의 삶이 우리 안에서 뒤섞여 있음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두 아들의 삶이 모두 내 안에 공존한다고 말하는 것이 실제 우리 삶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

작은아들의 삶에서는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세계를 원하는 욕구를 보게 됩니다. 내가 왕이 되는 그런 세계입니다. 아마도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그는 언제나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맘대로 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곳을 찾아 아버지 곁을 떠납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을 누구의 눈치 볼 필요 없이 행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행하죠.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귀찮은 존재, 내 욕구를 실현하고 풀어내는 데 방해되는 장애물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상속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 왕처럼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납니다. 마찬가지로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나에게 아내도, 남편도, 아이도 때로는 장애물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하느님은 그런 나에게 언제나 귀찮은 충고자입니다. 십계명은 귀찮은 올가미일 뿐입니다. 작은아들은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말해줍니다.

큰아들의 삶에서는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나보다 더 위에 자리한 권위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 권위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권위로부터 인정을 받아, 내 위치가 견고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마도 큰아들에게는 자신의 열심함과 충실함을 알아주는 아버지, 그래서 그에 따른 지위를 집 안에서 자리매김해주는 아버지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인정받음이 중요합니다. 때문에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열심함과 충실함을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등에 업고 집 안에서 아버지 다음의 권위자가 되는 것, 그것이 큰아들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큰아들이 아버지 집에 머문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죠. 때문에 큰아들에게 주변 인물은 완벽하고 그릇됨 없이 살려는 자신의 삶을 인정해 줄 때만 의미를 가질 뿐, 아버지와 집 안 사람들의 속마음, 속사정은 그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주시는군요."라는 말씀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런 큰아들에게 돌아온 동생은 용서해야 할 대상도 연민을 느껴야 할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나눠줄 수 없는 '권위', '인정', '존경'을 두고 경쟁해야 할 또 다른 적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우리 안에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 세상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어 나의 권위가 드높이 올라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떤 때는 우리 삶을 작은아들과 같은 삶에로 이끌기도 하고, 때로는 큰아들과 같은 삶에로 이끌 곤 합니다. 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작은아들의 모습과 큰아들의 모습을 자기 안에 갖고 있죠.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저 사람 안에 있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모습에 一喜一悲하는 것이 아니고 이 둘 모두를 아우르는 아버지의 모습에 눈길을 주는 것입니다. 큰아들이 더 나으냐, 작은아들이 더 나으냐는 것을 따지는 것은 또 다른 욕망의 모습일 뿐, 중요한 것은 이 둘 모두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대답해 주고, 네가 몰랐던 큰일과 숨겨진 일들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

하느님에게 답이 있습니다. 큰아들, 작은아들의 모습을 사는 나 그리고 너의 삶에 대해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 분별하는 데 답이 있지 않고, 이 모두를 아우르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시는 하느님의 공평하신 자비와 사랑에 답이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을 우리의 번잡한 삶의 모습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 모든 답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눈길을 주며 생활합시다. 아멘!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돌아온 탕자>, 캔버스 유화, 236X262cm, 국립미술관, 워싱턴




'돌아온 탕자'는 무리요가 루카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를 소재로 50세의 원숙한 나이에 그린 작품이다.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과 그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만남의 장면인 비유의 절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은 아버지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들을 감싸 안고 있는 인자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배경은 집 앞으로, 돌아온 아들을 맞으러 집 밖으로 달려 나온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붉은 색 외투를 입은 노인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은 조아리고 있는 젊은이를 감싸 안고 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젊은이는 옷이 다 헤어져 있고, 맨발에 발바닥은 지저분해져 있다. 아버지는 허리를 구부려서 아들을 감싸 안고 있으며 아버지의 등 뒤에 두 사람의 시선이 부자의 만남을 지켜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을 지켜보는 두 시선은 아버지의 왼손에서 이어지는 사선의 위치에 있는 여인의 시선과 기둥의 그늘 뒤에 서 있는 큰아들의 시선이다.

여인은 작은아들의 형수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형수는 시동생이 다시 돌아온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비난의 시선을 아버지는 등으로 가리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비록 모든 사람들이 질책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좌우되지 않고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신다는 것을 그림은 이야기해 주고 있다. 황금분할의 위치(1/3의 위치로서 그림의 강조점)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아들의 두 손과 그를 감싸 안고 있는 아버지의 손이 있다. 무릎을 꿇은 아들의 모습에서 참회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으며 감싸 안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