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브라함신부] 사순 제5주일: 허물, 숨김과 드러냄의 차이

2010년 3월 21일 일요일

사순 제5주일

이사야서 43,16-21
필리피서 3,8-14
요한복음 8,1-11

허물, 숨김과 드러냄의 차이






2010년 3월 21일 일요일



사순 제5주일

이사야서 43,16-21
필리피서 3,8-14
요한복음 8,1-11




허물, 숨김과 드러냄의 차이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정확한 년도가 기억나는 것은 아닌데, 언제가 어떤 리서치에서 천주교 신자가 제일 부담스러워 하는 것, 이것이 없으면 천주교 신자가 늘어날 수 있는 것으로 지목된 게 ‘고해성사’랍니다. 공감이 됩니다. 자기 허물을 들추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장막 하나 가려진 고해실에서 꼭꼭 숨겨두고 싶었던 허물까지 털어놓아야 할 때는 창피한 감정과 더불어 사제가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불편하고 찜찜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죠. 그런데도 교회는 적어도 일 년에 반드시 두 번은 고해성사를 보게 합니다. 부활과 성탄 판공이 그것이죠.

일 년에 두 번 해야 하는 판공성사를 두고 어떤 분들은 ‘나는 별로 지은 죄가 없다. 남들도 다 그만큼 하는데 뭐 그런 것을 두고 죄냐 아니냐를 왈가왈부 하는가’하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데 굳이 내 입으로 또 말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라고 하며 성사를 안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고해성사를 통해 갖게 되는 ‘죄의식’과 불건전한 ‘죄의식’을 혼동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알게 되는 죄의식은 죄에 대한 경계심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의식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 1서 1장 7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를 신뢰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불건전한 ‘죄의식’은 애써 자신의 잘못을 외면하거나 묻어 두게 하여, 마음의 평화가 없게 만듭니다. 늘 죄의식 속에서 찜찜한 삶을 살게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던 이들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는 예수님 말씀에 나이 든 사람부터 돌을 놓고 돌아갔다는 말씀은 이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고 내 욕망을 쫓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숙한 사람이란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어둠과 빛 모두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오늘 예수님께서 용서해준 이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입니다. 현장에서 발각된 그 여인의 죄목은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모든 이가 다 알고 있는 죄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의 죄를 공개적으로 지탄했고 그래서 예수님 앞에 서게 됩니다. 물론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가 이 여인을 통해 예수님께 간계를 쓰고 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에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았다면, 이유야 어떻든 모든 사람에게 발각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을까?

오히려 여인에게는 죄가 숨겨진 채로 있지 않게 된 바로 그 상황, 현장에서 발각된 채 모든 이에게 그의 죄가 드러난 그 상태가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이렇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죄가 용서 받게 된 것은, 그녀의 죄가 숨겨져 있지 않고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만약 발각되지 않았다면 여타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슴 한편에 묻어 둔 채 살아갔을 겁니다. 자신이 행한 어둠에 대해 애써 눈길을 주지 않으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나만 가슴에 묻고 살면 될 것이다.’ 사실 이런 마음에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핵심은 그녀의 죄가 자의였든 타의였든 간에 드러났기에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래서 모든 이 앞에 나의 허물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게 된 상황, 즉 죄가 드러난 상황은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녀가 더 이상 죄를 부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발각되었기에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시킬 수도, 묻어 둘 수도 없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는 죄를 성찰함에 있어 나의 허물을 인식하고 뉘우치는 단계인 통회의 단계에서 생겨나는 특징입니다. 통회를 통해 성찰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더 이상 숨기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피해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통회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의 지금의 상황을 바로 보고 인정하는 통회의 단계에서부터였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루카15,17-20)

탕자가 아버지를 찾게 되고, 그래서 아버지의 환대를 받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면서부터 였습니다. 숨기는 것이 아니고, 피해가는 것이 아니고,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것을 드러내어 받아들이면서 부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간음한 여인 또한 비록 자의는 아니었을지라도 자신의 허물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상황, 그래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고해실을 찾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모르시기에 그분께 나의 죄를 알려 드리기 위해 고해실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이제야 제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게 되었음을 告하고, 그런 나를 다시 당신 빛 안에 받아주시기를 청하기 위해 고해실을 찾는 것이죠. 그래서 성찰이 필요하고 더 이상 나의 허물을 피해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사제 앞에 나의 허물을 공개하는 것이죠.

이제 나흘 후면, 부활 판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기에 부족한 점이 나에게 있다면 성찰하고, 이를 고백함으로써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브뢰헬의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1565년경, 캔버스 유채, 24 x 34cm, Courtald Institute 갤러리, 런던


브뢰헬은 종교와 신화적 주제가 주류를 점하고 있던 시대에 자신이 살았던 사회와 시대의 일상적인 삶을 주로 그렸던 화가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브뢰헬이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에 관한 성경말씀 중에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의 내용을 그린 것이다. 예수님 주변의 잘 차려입은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아무말씀도 없이 땅에 무엇인가 쓰고 계신다. 가까이에 있던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이 바닥에 쓰고 있는 글을 보고 있다. 곧이어 허리를 펴신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흩어지고 있는 광경이다. 브뢰헬은 <간음한 여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바닥에 글을 쓰는 장면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번잡한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마치 정적 속에서 벌어지는 예수님의 심오한 무언의 소리를 전하고자 회백색으로 통일하였다. 그는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신 예수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헤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