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브라함신부] 하느님 자비 주일:"너희에게 평화"

2010년 4월 11일 일요일

하느님 자비 주일

사도행전 5,12-16
요한 묵시록 1,9-11ㄴ.12-13.17-19
요한복음 20,19-31

"너희에게 평화"






2010년 4월 11일 일요일



하느님 자비 주일


사도행전 5,12-16
요한 묵시록 1,9-11ㄴ.12-13.17-19
요한복음 20,19-31




"너희에게 평화"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하느님 자비 주일'입니다. 돌아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2000년 4월 하느님 자비의 사도로 알려진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고, 그 이듬해인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왔습니다. 여러분이 미사 전에 바친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가 바로 이 성녀에 의해 알려진 기도입니다. 보통 오후 3시에 이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 본당에도 월요일과 금요일 오후 3시에 성체조배실에 오시면 이 기도를 바치는 그룹이 있습니다. 오후 3시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시간이죠. 성체조배실에 오시기는 어렵지만, 이 시간에 함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전 세계 모든 신자가 예수님 돌아가신 시간에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는 것을......

오늘 복음 말씀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처음으로 제자들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두려움에 숨어 있던 제자들! 이런 처지의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만나는 상봉 장면에서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첫 인사말은 지극히 형식적으로 들리는 "너희에게 평화"라는 말입니다. 상황으로 보아서는 이 말보다 좀 더 극적인 표현이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평화"

천주교에 입교하기를 원하는 분들께 입교 동기를 물으면 가장 많은 이유 중 하나가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든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든… ….

입교 처음부터 그렇게 원하는 '평화'
그러나 이 '평화'와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화'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어떤 차이일까?
그냥 평범한 눈으로 보기에, 우리가 손에 넣기를 애타게 바라는 평화는 결과로서의 '평화'이고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평화는 과정으로서의 '평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과로서의 '평화'는 나를 내어주고, 나를 비우는 그 과정이 생략된 '평화'입니다. 그래서 결과로서의 '평화'만을 찾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맞춤형, 자기중심의 '평화'를 추구합니다.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자기를 비움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평화'를 자기를 내어줌 없이, 자기를 비워줌 없이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기준에 맞춰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오늘 토마 사도도 예수님의 부활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확인하려 합니다. 자신의 눈과 손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마음 좋으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기준에 맞추기를 고집하는 토마 사도에게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토마 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먼저 믿는 행위, 보지 않고 믿는 행위는 토마 사도가 요구한 방식과는 반대되는 예수님의 방식, 예수님의 기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먼저 믿어 주는 것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주는 삶입니다. 사실 의심을 버리고 먼저 믿어 주는 삶은 '자기'를 비워내는 작업과 함께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삶의 방식이지만, 그 향기는 넓고 깊게 퍼져 나갑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던지신 인사말,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는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삶'에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평화를 세우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는 '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식- 의심을 버리고 내가 먼저 너를 믿어주고 신뢰해주는 삶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평화'를 당부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주간, 우리의 삶이 먼저 믿고 먼저 신뢰하며 다가가는 삶이되기를 희망합니다. 아멘!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Bernardo Strozzi, 1581-1644)의 <사도 성 토마의 의심>, 89 x 98 cm. 유화(1620년작), 런던, 피터 무어 (Peter Moors) 재단

이 작품은 요한복음 20장에 나타나고 있는 주님 부활에 대한 의심과 회의에서 신앙으로 회귀하는 토마의 의미심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명암의 대조가 뚜렷한 그림에서 작가는 우리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창에 찔린 주님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넣고 있는 토마에게로 향하게 하며, 주님께서는 토마가 손가락을 넣는데 불편이 없도록 당신 오른 팔을 들고 계시는데, 이 두 사람의 모습에 나타나고 있는 극명한 대조에서 죽음과 부활의 강력한 암시가 드러나고 있다. 세파에 그을린 대머리에 넝마처럼 헤어진 옷을 입은 토마의 모습과 비록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신 흔적은 역력하지만 흰빛 광휘에 쌓여 있는 주님의 모습은 빛과 어둠, 불신과 믿음이라는 전혀 상반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토마의 모습은 아직 믿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의혹과 회의 속에 방황하며 속진(俗塵)에 찌들린 서글픈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작가는 또한 토마를 비스듬한 시각에 세워 옆구리의 상처에 넣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한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배치하면서, 그분은 토마에게 죽음을 이기시고 인간의 모든 제약에서 해방된 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의 상처 받던 그 모습을 통해 당신의 부활을 믿게 하신다. 토마에게 자기 옆구리 상처를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너무 밝고 생기에 차있다. 그분의 얼굴색은 십자가의 고통을 받은 붉은 피의 흔적이 있지만 가슴을 드러낸 부분의 색깔과 함께 더 없이 깨끗하면서도 아름다운 피부 색깔이 이 세상의 한계에서 벗어난 천상의 신분임을 암시하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