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브라함신부] 부활 제3주일:사랑하면 알게되고......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부활 제3주일

사도행전 5,27ㄴ-32.40ㄴ-41
요한 묵시록 5,11-14
요한복음 21,1-19<또는 21,1-14>

사랑하면 알게되고......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부활 제3주일


사도행전 5,27ㄴ-32.40ㄴ-41
요한 묵시록 5,11-14
요한복음 21,1-19<또는 21,1-14>




사랑하면 알게되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유 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보면, 19세기 조선 말에 어떤 유학자가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

사랑이 앎의 시작이고, 변화의 시작임을 아주 잘 표현한 문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랑을 그리스 사람들은 옛날부터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이해하였습니다. 육체적인 본능이 강조되는 사랑의 표현인 에로스(Ἔρως), 상대에 대한 신뢰와 우정이 강조되는 표현인 필로스(Φιλωσ), 조건 없이 내어주는 나눔이 강조되는 표현인 아가페(Αγαπη)입니다.

에로스(Ἔρως)로 표현되는 사랑은 이성(異性)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 단계의 사랑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고,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욕구가 강할 때이죠. 이때는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는 내 욕구에 대한 채움이 우선시 되는 상태입니다. 필로스(Φιλωσ)는 상대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배려가 강조되는 사랑입니다. 이때는 내 욕구에 대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상대의 요구에 대해 귀를 기울이게 되는 상태입니다. 삶의 원숙미가 배어나는 때입니다. 아가페(Αγαπη)는 조건을 달지 않고 내어주는 베풂과 나눔이 강조되는 사랑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는 아버지와 같은 사랑,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에로스(Ἔρως)적인 사랑과 필로스(Φιλωσ)적인 사랑이 함께 공존합니다. 감정과 이성, 본능과 의지가 우리 안에 함께 공존하는 것처럼 이 두 가지 사랑도 우리 안에 함께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에로스적 사랑이 필로스적 사랑, 또는 아가페적 사랑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활동하기도 하고, 그래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 당부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수난 전날 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일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 대화를 희랍어 원문으로 읽으면 색다른 면을 보게 됩니다. 우리말로 사랑은 하나이지만,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희랍인들은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희랍어로 쓰인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던진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서 사용하신 동사는 ‘아가파스(αγαπασ)’입니다. 이는 아가페(Αγαπη)의 동사형입니다. 조건 없는, 무조건적인 내어줌의 사랑을 뜻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 물음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필레이스(ψιλεισ)’입니다. 이 단어는 필로스(Φιλωσ)의 동사형입니다. 우정의 단계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너도 나와 같은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같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 거죠. 아마도 이 물음에서 베드로는 수난 전날 자신의 부인(否認)을 떠올렸겠죠. 동시에 베드로는 그런 자신의 능력, 아가페적 사랑을 하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가페적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인데도 스승이신 예수께서 자신에게 신적인 사랑, 조건 없는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자신에게 물으신 것에 내심 뿌듯했겠죠.

그런데 예수님의 마지막 물음은 결국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 그것은 우정의 단계에 속하는 사랑임을 확언해줍니다. 실제로 필로스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슬픔은 ‘베드로, 네가 할 수 있는 사랑, 네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결국 필로스적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에 더 슬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이 결국 베드로를 슬프게 한 것이죠.

베드로를 슬프게 한 예수님의 단호한 평가,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 그것은 필로스적 사랑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세상은 자신이 행하는 사랑, 그것은 그릇됨이 없고, 오류가 없고, 그래서 전적으로 ‘너와 나’를 유익하게 이끌어 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내 사랑과 호의’에 모든 이가 따라오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일수록, 그 안에 폭력이, 거짓이, 미움이 더 많이 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말에 자기 욕망과 욕구를 감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너의 능력으로는 神的인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냉철한 평가는 비록 베드로를 슬프게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베드로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된 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사랑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해줬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행위가 폭력이 되지 않고, 미움이 되지 않고, 너에 대한 판단이 되지 않고, 내 마음을 몰라주는 너를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는 결단이 되지 않으려면, 내가 하는 사랑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를 소유하거나, 강압하면서도 ‘이건 너를 위한 사랑이야’라고 합리화시키지 않게 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당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알고 인정해야 할 것은 내가 말하는 사랑 안에 뒤섞여 있는 불순물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멘!




라파엘로(RAFFAELLO Sanzio)의 <베드로에게 양 떼를 맡기시는 그리스도>,1515년경, 캔버스에 템페라, 345 x 535cm, 빅토리아&알버트 미술관, 런던

요한복음 21장 1-19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티베리아스 호숫가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신 후 양떼를 맡기시는 내용이다. 이 성경의 내용을 라파엘로(1483-1520, 이탈리아)는 <베드로에게 양 떼를 맡기시는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화폭에 옮겼다. 제자들이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은 후였으므로 그림의 배경에는 호수가 있고 뱃머리가 보인다. 언덕 위의 작은 마을과 고딕 성당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교회의 수장으로 양 떼를 맡기심을 의미한다. 그림의 중심에는 열한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선명한 예수님께서 양 떼와 제자들 사이에 서 있다. 그 분은 한 손으로 베드로를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양 떼들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말씀하신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서 주신 천국의 열쇠를 가슴에 안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반응이다. 절반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절반은 자기 자리에 그냥 서 있다. 그리고 제자들의 정 중앙에 있는 한 제자는 몸은 예수님을 따르지만 머리는 서 있는 제자들을 향하고 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 속에 예수님 사랑에 대한 그들의 마음가짐이 담겨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