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브라함신부] 사순 제2주일: 예수님의 변모, 그리고 기도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사순 제2주일

창세기 15,5-12.17-18
필리피서 3,17ㅡ4,1<또는 3,20ㅡ4,1>
루카복음 9,28ㄴ-36

예수님의 변모, 그리고 기도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사순 제2주일

창세기 15,5-12.17-18
필리피서 3,17ㅡ4,1<또는 3,20ㅡ4,1>
루카복음 9,28ㄴ-36




예수님의 변모, 그리고 기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동계올림픽이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피겨 스케이팅 때문에 신문도 온통 김 연아와 아사다 마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듣고 뒤늦게 김 연아 선수의 연기를 보았는데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제가 신부인지라 쇼트 프로그램을 시작하러 나갈 때 성호경을 그으며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김 연아 선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이뤄진 기도 행위였지만, 그 기도를 통해 아주 많은 것을 전해주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자 했던 그녀의 간절함, 아주 큰 도전의 순간에 하느님께 의지하고자 했던 그녀의 마음... 짧은 순간에 행해진 기도였지만 믿는 이에게는 뿌듯함을, 믿지 않는 이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기도가 아니고서는 이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오늘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변모 또한 기도 중에 일어납니다.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세 명의 제자 앞에서 기도하시는 중에 본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는 감추고 있던 자신의 본래 모습, 본래 신분을 기도 중에 제자들에게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이 변모는 세 명의 제자들에게 아주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세속 신분은 모두 보잘 것 없었습니다. 목수, 어부, 세리, 열혈당원...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그런 신분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새 율법 아래 통치되는 하느님 나라를 말하며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맞습니다. 당신들의 말씀이…’였을까요? 물론 복음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많이 모았다고 증언합니다. 하지만 이 기적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은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곁에서 모시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본래 모습은 고사하고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힘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 또한 힘들게 하는 요소였습니다. ‘죽었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난다는 것’과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산다’는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위를 따르는 것이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와 중에 일어난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제자들에게는 그 자체로 위로였습니다. 내가 따르는 스승이 거짓 스승이 아니고 하느님의 참사람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위로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스승님,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되죠.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를 체험한 세 제자는 나중에 공동체에 가장 큰 인물들이 됩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체험이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을 저버리지 않게 한 것이겠죠. 마치 좋은 피정에 참가하여 깊은 체험을 하게 되면 힘들고 어려울 때 그때의 체험을 떠올리며 하느님께 대한 끈을 놓지 않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바로 기도 중에 일어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던 중에 이 모든 일, 예수님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것 그리고 이로 인해 제자들이 스승에 대해 갖게 된 존경과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확신과 위로... 이 모든 것이 기도 중에 일어납니다.

기도
기도는 악령을 쫓는 힘만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숨겨진 채, 가려진 채 존재하고 있는 하느님,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방편입니다. 오상의 성 비오 신부님은 "사람은 책 안에서 하느님을 탐구할 수 있으나, 발견하는 것은 오직 기도 안에서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통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합니다. 기도하는 신앙인만이 세상 안에서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계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에 대해 많은 분들이 힘들어합니다. 어떤 분은 분심 때문에 힘이 든다고 합니다. 기도 중에 떠오르는 분심 때문에 오히려 죄를 짓는 것 같아 기도를 중단했다고도 합니다. 이는 명백한 악의 유혹입니다.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 상념이 분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무엇이 분심인지, 어떤 것이 하느님과의 소통에 장애 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기도 중에 일어나는 분심은 내가 기도를 하고 있다는 징표입니다.

어떤 분은 사는 것 자체가 기도라고 말합니다. 눈뜨고 눈감을 때까지 살아서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말합니다. 이런 분들은 대 데레사 성녀, 십자가의 성 요한, 이냐시오 성인과 같은 기도의 대가(大家)들의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이냐시오는 삶 전체가 기도가 되게 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던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시간을 따로 갖지 않고도 이미 삶 그 자체를 기도로 전환했다고 말하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 분들을 교회 기도의 스승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신앙생활은 밭이라는 세상에 숨겨진 채로 묻힌 하느님,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 눈을 맑게 하여 이 세상 안에 숨겨진 채로 묻혀 있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강력한 방편입니다. 그래서 비오 신부님은 기도에 대해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기도의 인간은 하느님을 모욕하고 그분에게 불충할지 모른다는 걱정 말고는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공포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을 겁내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만큼 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 마음의 통로를 만드는 열쇠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을 하느님에게까지 올라가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의 산소입니다.
기도는 우리 영혼을 친밀하고 심오하게 하느님과 결합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기도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여러분 시간을 쾌락을 위해서 쓸 수도 있고, 하느님을 위해서 쓸 수도 있습니다. 사순 기간만이라도 ‘시간의 십일조’를 행하십시오. 재물에 대한 애착으로 수입의 10분의 1을 하느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못할지라도,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에 대한 십일조, 적어도 하루에 1시간을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해서 갖게 되는 기도 시간은 여러분을 타볼산 정상에서 주님의 참모습을 보게 된 세 명의 제자들처럼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 숨겨진 채 계신 주님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해 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아멘!




조반니 벨리니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1487년,나무에 오일, 115x151.5cm, 나폴리,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

화면 중앙에 하얀 옷을 입고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오란테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두 인물 중 화면 왼쪽은 모세이고 오른쪽은 엘리야이다. 산 위라고는 하지만 봉우리와 함께 여러 건물들도 보이고 소를 몰고 가는 사람도 작게 묘사되었다. 아마도 화가 조반니 벨리니가 살았던 베네치아는 갯벌 위에 세워진 도시로, 산다운 산이 없었기 때문에 화가는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풍경을 그렸고 이러한 그의 풍경은 미술사에서 이상적인 풍경화(Ideal Landscape)를 태동케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화면 왼쪽부터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예수님의 눈부신 모습과 구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당황한 모습이 역력하다. 야고보는 너무 놀라 달아나려는 듯하며 어린 요한은 뒤로 자빠졌고 그래도 제자 중 가장 큰 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