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브라함신부] 사순 제3주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2010년 3월 7일 일요일

사순 제3주일

탈출기 3,1-8ㄱㄷ.13-15
코린토 1서 10,1-6.10-12
루카복음 13,1-9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2010년 3월 7일 일요일



사순 제3주일

탈출기 3,1-8ㄱㄷ.13-15
코린토 1서 10,1-6.10-12
루카복음 13,1-9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신약성경을 읽다 보면 구약성경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심판하시는 하느님, 죄인을 벌하고 선인에게 상을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보다는 罪人의 회심을 기다리시는 하느님, 탕자의 회심을 기뻐하시는 하느님, 잃어버린 양을 애타게 찾아 헤매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더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당신을 비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에게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고 하시며 당신의 이와 같은 행보가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임을 명확하게 밝히시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리와 창녀, 나병환자와 같은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지는 죗값으로 인해 벌을 받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는 일부의 특정한 사람들만의 생각이 아니었고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지배적 사고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결부되어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고, 죄를 지은 너는 버림받은 존재, 그래서 어울려서는 결코 안 되는 존재로 여겨졌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려하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시며 오히려 그들을 의인으로 자처하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보다 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시각을 어떻게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요한복음 8장 1-11절에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이른 아침, 성전에 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던 예수님 앞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세웁니다. 그리고 죄인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는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지금까지의 태도를 보고는 이 여인을 빌미로 예수님께 올가미를 지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떠봅니다. '이런 여자는 돌을 던져 죽여야 하지 않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하느님 앞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단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군가를 단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번뜩이는 성찰의 눈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기 시작합니다. 때문에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던 이들, 어쩌면 숨겨진 자신의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여인의 죄를 더 다그치며 묻던 그들로 하여금 돌을 내려놓고 하나씩 떠나가게 만듭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에 이끌려 항상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뒤로 한 채, 욕망이 부추기는 것, 욕망이 제공하는 쾌락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선택하며 살려고 하는 나의 경향 때문에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단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꼴을 먼저 살피라고 말씀하셨던 거죠.

이러한 예수님의 시각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는 자신이 강도질을 하고, 불의를 저지르며, 간음을 하는 이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의 규율을 잘 지키고 있다며 기도합니다. 허나 세리는 성전에 들지도 못한 채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이라 고백하죠.(루카18,9-14참조) 이 둘 중 하느님께로부터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 받는 이는 바리사이가 아니고 스스로를 죄인이라 고백한 세리였습니다.

이를 보고 추측하건대, 죄인은 자신의 허물에 대해 성찰하고 뉘우칠 줄 모르는 마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바라보지 않으려는 닫힌 마음, 교만한 마음인 거죠. 하느님을 등지는 사람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물을 바치려던 갈릴래아인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건을 예수님께 전한 이들은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죄인이니 당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았다.' '너희는 그들보다 선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그것이 너의 죄에 대한 성찰과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네 앞에 놓인 것은 오직 멸망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제물을 바치러 가다 빌라도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일은 엄밀히 따져 그들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가십거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고 회개였습니다. 다가온 하느님 나라, 예수님께서 그토록 애타게 말씀하셨던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죠.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깨우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불행에 대해 궁금해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너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너의 허물과 죄에 대해 회개하고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더 이상 너의 구원과 상관없는 다른 것에 눈길을 주며 에너지를 쏟지 말고 너의 구원에 힘쓰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필리2,12)라고 필리피 교회 사람들에게 당부하시죠. 나의 구원을 위해 놓쳐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은 내 주위에 일어나는 일들 속에 나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징표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사순 3주간입니다. 사순 시기도 중반에 접어듭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 나의 허물을 먼저 보고, 나의 그릇됨을 먼저 살펴 고쳐나가기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매 순간을 깨어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로렌초 로토(Lotto, 1480-1556)의 <간음한 여인과 예수>, 유화, 124×156cm, 1530-35년,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로토는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화가이다. 그는 화려한 색채와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하여 간음한 부인과 예수의 만남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화가는 사람들이 예수께 간음한 부인을 데리고 와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는 대목을 그렸다. 비난하는 사람들의 험상궂은 얼굴과 자비로운 예수, 그리고 회개하는 여인의 모습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