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 6주간(화요일) : 요한16,5-11

어느 날 TV 에서 지능이 모자란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아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일반 학교에서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정상인들과 함께 지내는 법을 알아야 세상에서 보다 잘 적응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하도록 키웠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어야만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학교는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남들을 방해하지 않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착하기만 한 아들의 주위에는 도움을 주는 친구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아들은 방과 후에는 버스를 타고 아버지의 회사로 가서 건물의 화장실을 치우는 일을 합니다. 고무장갑을 끼고 변기를 깨끗하게 닦는 단순한 일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것이 아들의 반복된 일상이었습니다.

회사 사장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다른 사원과 똑같이 한 달에 한 번 일한 만큼의 보수를 타가도록 했습니다. 아들이 경리과에서 급여를 제대로 받아 가는 일도 큰 수업이었습니다. 하루 한 번 화장실을 치우고 받는 얼마 안 되는 적은 돈이었지만, 돈을 제대로 세고 계산하는 일을 스스로 하는 일이 아들에게는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였습니다. 벌써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데도 말이죠.

그분은 아파트를 한 채 사서 자기 아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모아 함께 살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돌보는 사람까지 붙여주고는 기본적인 규범들을 수도 없이 가르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또 열악한 환경에 있는 장애아들의 자립을 위해 투자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습니다. 그들 모두가 혼자서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뒤를 돌보아주는 일에 헌신을 하는 모습이 눈물겨웠습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있어서 이렇게 뒤를 돌봐 주고 있지만, 내가 죽으면 저 애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죽은 뒤는 고사하고 지금이라도 내 몸이 투명하게 변하는 약이 있으면 먹고 따라 다니고 싶어요. 저 애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누구인지. 저 애를 정말로 위해주는 친구는 누구인지 알고 싶고요. 무슨 일이 저 애에게 벌어지는지 하루 내내 따라다니며 지켜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개신교 신자였던 그분은 담배를 물어 길게 연기를 내뿜었습니다. 학교 가는 아들을 창문으로 내다보며  말끝을 흐리던 아버지! 배경음악과 함께 카메라는 뺨으로 흘러내리는 아버지의 눈물을 비춰주었습니다.

그 마지막 장면을 보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바로 저 마음이구나! 예수님이 제자들을 두고 가는 심정이! 투명하게 변하는 약이 있다면 그걸 먹고라도 쫓아다니며 보호해주고 싶은 심정! 보이지 않는 현존양식으로 제자들에게 돌아오는 방법! 예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은 바로 예수님과는 다른 위격(位格) 성령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시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 영원히 세세 대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식!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해도 슬퍼할 것이 없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남겨두고 가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부실한 자녀들 곁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챙겨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를 새로 나게 하소서!” “성령님! 저희를 위해서 깊은 탄식으로 기도해 주시고, 저희의 구원에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가 하느님을 믿어서 사랑을 많이 받는 자녀가 되게 도와주소서!”

오늘 나에 대한 예수님의 극진한 마음과 사랑을 느끼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