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 주간 화요일 (나해)
예수님의 행적을 분석해보면 예수님은 다른 어떤 존재에 앞서 교육자셨습니다. 복음서에 주고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거의 대부분 제자들이나 백성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의 모습입니다.
그 학교의 교장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교장은 종래의 교장과는 완전히 다른 교장이셨습니다. 종래의 교장들이 고수해오던 교육철학이나 교육노선을 완전히 초월하는 획기적인 교육방식을 통해 제자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독창적이고 획기적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과 삶의 일치” “언행일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대 지도자들로 손꼽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과는 달라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신이 가르치신 바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복음서 그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말씀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복음서 그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속 보이는 모습, 뒤가 구린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시 그럴듯하게 폼을 잡으면서 “내가 스승이네. 교육자네” 자랑하던 바리사이파 사랑들과 율법학자들을 대상으로 혹독한 독설을 퍼부으십니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마치도 회칠한 무덤 같구나. 너희는 너희의 그 이중적인 생활로 인해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그럴 듯한 말로 백성들 앞에서 가르치고 많은 율법조항들을 만들어 백성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놓았지만 너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하시면서 당시 지도자들의 가르침 따로 삶 따로의 이중적인 모습에 크게 마음 아파하십니다.
허영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자기과시욕의 산물이 바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윗자리를 찾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 불리길 좋아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태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당신이 선포하신 말씀에 대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교육방식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눈여겨볼 일은 이론적이거나 원론적인 것에 바탕을 둔 삶 따로 가르침 따로의 이중적인 교육이 아니라 가르침과 실생활이 완벽하게 일치되고 조화된 살아있는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남에게 기도하는 사람, 열심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이마와 손목에 성구넣는 갑(테필린: 유다인들이 기도를 할 때 토라의 구절이 적힌 작은 가죽주머니를 두 팔과 이마에 묶는데 이것을 테필린이라고 부름. 부적이란 뜻.) 지지트(유다인들이 기도할 때 머리에 숄(탈리스)을 쓰라고 명하고 있는데, 이 숄에는 네 귀퉁이에 지지트라는 장식을 달도록 하고 있다. 네 귀퉁이의 술 장식은 모두 39회를 감아 올렸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주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다.”라는 글자의 획수와 같은 것이다.
“신은 내 안에서 자신의 시종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를 좋아한다.”(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인생은 진짜다. 인생은 진실하다. 무덤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영혼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인생찬가,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테피린 – ‘기도’라는 뜻인데 성구넣는 갑, 부적을 의미함.(탈출 13,1-10)(신명 11,13)
*지지트 – 옷 술을 크게 달아서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고 과시함.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허영심과 자기과시욕을 질책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숭고하고 으뜸가는 사람은 남의 눈에 우월하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