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 사도축일
요한복음에서 가장 뛰어난 신앙고백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성 토마 사도의 고백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행복선언도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사도들과 선배 신앙인들의 증거를 보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토마 사도나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스승께서는 자신과 다른 제자들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수많은 기적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앉은뱅이, 소경,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 중풍 병자를 고치심, 나병 환자도 고치고, 마귀도 쫓아내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하시는 분께서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서는 설익은 무화과를 달콤하게 하지도 않고,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지도 않으시고, 왜 남을 위해서만 능력을 사용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일부러 고행과 수난의 길을 자청해 가시면서 남을 위해서는 온갖 능력을 다 동원하시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이해한 사람만이 비로소 참다운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토마 사도는 왜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바닥에 손을 넣어 보고자 했을까요? 그것은 곧 고난의 상처가 없는 예수님은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고난과 고통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사람은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수 구창모의 노래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에 가사처럼, 사람은 아픈만큼 고난이 큰 만큼 성숙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난과 고통이 없다면 모두가 아이들이고 어른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에 있어서 고난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기쁨과 행복도 더 크게 와닿는 것 같습니다.
고통과 고난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는 좋은 도구입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 행복만 있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고 하느님을 찾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가 왜 망했을까요?
소금을 팔아 많은 돈을 벌어 자기들만을 위해서 부귀영화와 쾌락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부귀와 물질적 풍족함, 쾌락에 몰입하고 거기에만 만족하고 매달리며 all in 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도 찾지 않고 외면하였고, 감사도 잊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없는 행복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신앙은 자기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목적지를 찾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의심하고 질문하고 진리를 찾아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믿고 있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려면 먼저 이분이 확실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지도해 주시고 깨우쳐 주시던 그 예수님, 그 스승님이신가 확인해야 합니다. 부활하셨다는 이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분이 맞는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의심을 버리고 참 신앙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혐오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게으른 신앙인, 나태한 신앙인,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르는 신앙인은 주님께 걸림돌입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이들을 주님께서는 뱉어버리실 것입니다. 일곱 가지 죄의 뿌리 중 하나가 게으름, 나태, 미지근함입니다. 주님께서 아주 지겨워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이 미지근한 영혼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게쎄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하고 외치셨던 겁니다. 깊은 혐오감을 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
라면을 끓이려고 하는데 아무리 스위치를 조작해서 온도를 올리려고 해도 미지근하기만 하고 물이 끓지 않으면 답답할 것입니다. 더운 날씨에 에어 컨디셔너를 틀었는데 차고 시원한 바람이 나오지 않고 미지근한 바람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은총을 부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늘 게으르고 불신하며 겉도는 신앙생활만 하는 사람을 본다면 어떠실까요?
토마 사도는 뜨거운 분이셨습니다. 미지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호하고 분명한 신앙인이 성 토마 사도였습니다. 뜨거운 신앙을 지니거나 아예 냉담하거나 양자택일해야 합니다. 적당히 대충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그 까이꺼 뭐 대충”이 아니라 근면하고 성실하며 뜨거운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