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2주일
방글라데시에서 1975년부터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미국인 봅 멕카일 신부에게 그곳의 무슬림들이 찾아와서 “우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소?”라고 묻자, 신부는 “당신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밖에 없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역설입니다. 패러독스(Paradox) = 파라(παρα)반대하는 + 독소스(δοζοσ)의견 = 반대되는 의견(역설), 일반적으로는 모순을 야기하지 아니하나 특정한 경우에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을 의미합니다.
본래 십자가는 극악한 범죄자나 정치범을 고통과 죽음으로 이끄는 형벌의 도구였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는 형벌도구에서 구원의 도구, 성화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맡겨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으뜸가는 사도였고 교회의 반석이기도 하지만,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넓은 시야를 가지지 못하면 결국 인류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걸림돌, 방해물, (사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해야만 그것을 질 수 있습니다. “No pain, No Glory!”(고통 없이 영광 없다.) 교회 격언에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식사 전 기도나 일상 기도 때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이 십자가를 그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았음을 상기하며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고난의 가시밭 길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싫다고 할 것입니다. 제1독서의 예레미아 예언자나 복음의 베드로 사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레미아 예언자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예언자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가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쓴소리를 거침없이 하고 질타와 심판을 예고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아예 박해받을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이 예언자의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날마다 사람들에게 치욕과 비웃음거리가 되어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겠습니까? 예레미아의 예언자의 하소연 속에는 그런 고통스러움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백성의 지도자들과 수석사제들에게 배척받아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다는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당신의 길,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에 대하여 반박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일(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사람은 사탄이요, 걸림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뒤를 따라오려면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버리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반드시 자아 포기가 전제되어야 함을 일깨워주십니다. 자아 포기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예수님을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 참 끈질긴 것이 자아(ego)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가장 오래도록 남아있는 감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청각입니다. 그런데 이 청각보다도 훨씬 더 오래 남아있는 것이 있답니다. 바로 ego(자아, 자기 집착)입니다. 자아는 다른 모든 것들(욕망, 감각, 열정, 목숨 등)이 다 떠났는데도 그것보다 5분 후에나 떠난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에겐 자기애나 자기 집착, 미련이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상 생애 동안에 성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사셨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맡겨진) 권한, 능력, 열정을 잘못 판단하여 그것을 하느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자기 뜻에 따라 사용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그분의 제자들이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분별력, 판단력의 은혜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길을 갈 때, 십자가는 마치 산행의 등산 장비와도 같습니다. 사람의 일(편안함, 욕망 추구, 안락, 쾌락, 욕망, 자기애)만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희생, 헌신, 기도, 용서, 십자가 지는 것)은 뒷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길 청합시다. 거창한 일을 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기보다는 작고 소소한 일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작은 선행, 작은 봉사, 짧은 기도, 작은 나눔, 작은 희생 등을 실천하다 보면 그것이 모여서 큰 삶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갑자기 큰일을 찾아 행하려다 보면 아무 일도 못 할 수가 있습니다. 평소에 매일 작은 십자가를 하나씩 세우면서 길을 가다 보면 그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