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2주간 금요일 강론

세상에 많은 고통 중에 하나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고통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서 사회에서 추방되어 따로 살아가야 하는 고통입니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가장 두려운 재난은? 나병이었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도 가장 두려운 재난은? 나병이었습니다.

주위에 멀쩡한 사람이 지나가면 “타메(Tame)”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친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죄를 많이 지어 이런 신세가 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가혹한 형벌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불행한 사람을 구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

“내가 하고자 하니”(마태 8,3) -주님의 원의, 주님의 뜻(Fiat)

많은 사람들이 희망적인 메시지를 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 너는 할 수 있어!”그래 우리 한 번 해보자!”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권능과 권한을 지니고 해결해 주십니다.

“Voluntas Dei Potestas est”(라) 하느님의 뜻(의지, 원하심)은 곧 행해지는 것(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말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행하고자 하는 원의(뜻)를 가지시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권능을 지니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그대로 되어라.”

애정은 사람을 눈멀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순수한 애정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한쪽 면만 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기 방법대로, 자기 고집대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주님의 뜻을 벗어나는 맹목적인 사랑은 유혹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과 다르다면 사랑하면 안됩니다. 흔히 하는 말이 있죠!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주님,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살면서 이러한 일, 저러한 일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저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사실 자기 방식대로만 사랑하게 되면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게 됩니다. 사랑의 공통분모가 있어야만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사랑의 공통분모는 주님이십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을 하는 주체가 십자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웬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부부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나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는데” 나름대로 사랑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나를 기준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 중심적인 사랑, 타인 중심적인 사랑은 너를 기준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TV 프로 중에 시골 할아버지가 보기를 보고 문제를 내면 할머니가 문제를 푸는 방식이었습니다. 할아버지 : “여보, 우리 사이를 뭐라고 하지?” 할머니 : “웬수” 할아버지 : “아니 네 글자로” 할머니 : “평생 웬수”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보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잉꼬부부’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치유하실 수 있었지만, 나병 환자에게 직접 손을 내밀어 만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이 동작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너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너를 사랑한다고 표현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