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8주간 금요일
찬미 예수님!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갈라티아서 5장 22절에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관하여 나옵니다. 그중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통하여 맺을 수 있는 열매 세 가지가 있는데 바로 진실, 온유, 절제입니다.
진실 : 은 참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
위선 : 은 겉으로만 착한 체를 하거나 거짓으로 꾸밈. 겉으로는 미덕(美德)이나 선(善)을 표면적, 외관상으로 보여주나 실제적, 내면적 모습은 그렇지 못한 것을 말한다.
위선이 왜 나쁜가? 그것은 다른 사람을 속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모고해, 모령성체)
희랍어 αληθεια(알레테이아) 는 레테이아(숨다) + α(아니다) = 숨어있지 않다는 뜻으로 ‘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호칭 중에 “진리의 성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감추어져 있는 진실, 진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왜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걸까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도 범죄 이후에 하느님을 피하여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네 가지 기본 감정의 하나입니다. 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숨는 것이고 또 회개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나의 약점을 고백하고 드러내 놓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극단적인 상황을 미리 상정해 놓고 숨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가 죄를 통회, 보속, 결심하며 용서를 청할 때 용서해 주심을 믿기 때문에 희망을 가집니다.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 기도, 사랑에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끝까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기를 바랍니다. 고해소 안에서도 죄를 끝까지 고백하고 인정하기보다는 숨기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고해를 하도록 부추깁니다. 감춘다고 감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골방에서 속삭인 말을 지붕에서 선포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한 분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람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심판하시고 지옥에 떨어뜨리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에 집착하지 맙시다. 오직 하느님의 신뢰, 은총, 사랑만을 얻기를 바래야 합니다. 잠시 지나가고 마는 것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고 영원히 함께 살아야할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고, 흠숭하며 살아갑시다.
바리사이의 누룩이 왜 악한가?
하느님을 팔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경건한 척 하기 때문입니다. 누룩은 술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발효제입니다. 적은 양이라도 전체에 효과를 나타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빵을 부풀게 하듯이 적은 위선이 온 인격을 타락시킬 것입니다. 내 안에는 사악한 마음이 가득한데 그것을 숨기고 선한 것처럼 가장하는 거짓이 결국 우리를 거짓 속에 떨어 뜨릴 것입니다. 하나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서는 열 가지 거짓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 열 가지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 또 백 가지 거짓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의 주위에는 온통 거짓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거짓을 고발하고 인정하고 하느님과 세상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영적인 힘이 약하다면 그래서 마귀와 맞서 싸워서 승리하기 어렵다면 나보다 더 힘쎈 분이신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싸우고 영적인 진보와 성숙을 이루어야 합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과정에서는 이처럼 더 힘센 분이신 하느님께 의지해서 마귀의 올무(책략)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배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 보다 더 배우지도 못한 목수의 아들 예수님께 자기들이 밀린다는 것이 견딜 수 없고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을 속이는 그 순간이 바로 내가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숨을 데가 없습니다. 시편 저자가 말하지 않습니까? “주님, 저희가 주님을 피해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를 훤히 보고 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