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 주간 화요일
우리는 성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길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인전을 읽어보면 한 분 한 분 만날 때마다 그분들의 성덕에 자극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이웃사랑의 계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 있어서 그 범주를 더욱 넓히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한다면 신앙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처럼 넓고 기꺼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그 마음속에서부터 “원수”라는 관념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받아들여지려면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은 완벽한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잘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느님과 함께 머물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쇄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성신학에서는 완전한 덕(완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완덕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깨달은 사랑을 매 순간마다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에 독일 나치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라벤스 부룩’이라는 수용소의 벽에는 이런 글이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오 주님, 선한 의지의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악한 의지의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가했던 고통의 일체를 잊지는 마옵소서.
대신 이러한 고통 때문에 우리가 맺은 열매들, 우리의 교제, 서로에 대한 충성, 겸손, 용기, 관대함을 기억하소서.
핍박하는 자들이 주님 앞에서 심판받을 때,
우리가 맺은 이러한 모든 열매로 그들을 용서하소서!”
구약의 율법 중 가장 숭고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웃사랑의 계명(레위 19,18)이다. 이웃의 범주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정착민은 들어 있지만, 이스라엘의 원수, 적국은 제외대상이었습니다.
사실 구약성서 어디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대목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신앙 안에서 이스라엘 땅과 백성에 대한 공격은 곧 하느님께 대한 공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정사정 두지 않고 냉혹하게 적군을 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은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로 쉽게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 마음 안에는 원수라는 단어가 있어선 안 됩니다. 벗을 사랑할 의무는 원수 사랑의 의무보다 앞서고 큰 것입니다. 나아가 초자연적 덕행을 기르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생의 가치를 지니는 보화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가 밉다면 그 미움과 미워하는 대상을 주님께 봉헌하십시오. 심판을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내가 간직하고 있는 억울함을 주님께 봉헌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리 앞에 내놓고 정의로운 심판을 내리시길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죄인이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회개는 우리의 죄를 하느님의 눈앞에서 하느님의 등 뒤로 던져 버릴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고,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할 힘을 주시기를 주님께 청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