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사제가 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신부가 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게 되는데, 그때의 사유 대부분이 바로 ‘판단력 부족’입니다. 제가 얼마 전 신학교 교수 신부님으로부터 판단력이 부족한 신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신학생이 그 교수 신부님께 전화를 걸었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더래요. “신부님, 제가 이번에 재시험 통지를 받았습니다. 제가 이 기간 동안 ○○단체에서 봉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따라서 재시험을 미리 좀 보면 안 될까요?” 신부님께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봉사는 땀 흘리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청년들의 모임 연수의 도우미 정도의 역할로 굳이 신학생이 봉사할 필요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신학교의 성적은 자신의 성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도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없어도 될 봉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그럼 너는 신학교 그만두고 평생 그 봉사나 해라.” 사실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많은 판단의 기로에 서곤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말씀드리지요.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그리고는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갑게 맞이해야 당연할 것 같은데,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그렇게 야박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즉, 세속적인 인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보다 세상의 법칙에 선택의 기준을 둘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제 내 판단의 기준이 어디에 있었는지 다시금 반성해 보세요. 판단력 부족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관계는 어떤 것인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만나는 인간관계냐?

나를 중심으로 만나는 인간관계냐?

돈을 중심으로 만나는 인간관계냐?

사랑을 중심으로 만나는 인간관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