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 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마행위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길을 열어주고 또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적과 구마, 치유기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도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을 없애버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거지를 쓰고, 떼기장 쓰고, 모함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올가미를 씌워 걸리적거리는 정적이나 경쟁자를 없애고 자기 밥그릇 챙기는 사람들의 모습과 정치인들이 싸우는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자기들이 믿는 하느님마저도 자기들의 기득권과 이익 앞에서는 외면해 버리고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바라기보다는 자기들의 이익과 기득권이 보장받는 나라가 오기를 바랍니다.
편 가르기를 하는 곳은 정치판만이 아닙니다. 자기 목소리나 주장을 반영·관철되기를 바라는 모든 곳에서 내편과 니편을 갈라서 자기편이 하는 말과 행동은 무엇이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남의 편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자기들 맘에 들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거나 여론을 조장해서라도 그를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몰아붙입니다.
우리는 선입견, 편견, 이익 관계로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말과 행위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 명제 중에 라틴어로 “Agere sequitur Esse.”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라는 뜻입니다. 행위를 보면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녁 기도 때 반성 기도 중에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자세히 살피고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성찰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신자들에게 강론 때 이야기합니다. 보안만 확실하다면 매일 저녁 기도를 하면서 ‘성찰 일기’를 쓰는 습관을 들이라고 말입니다. ‘성찰 일기’만 잘 쓰면 고해소에 와서 “저 고해성사 본 지 오래돼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데요.”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죠?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다른 한편으로는 “너 자신을 잘 성찰해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디 성찰만 잘한다면 고해성사는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구마 행위를 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헐뜯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능력, 힘, 권능이신 성령으로 쫓아내신다는 겁니다.
죄라는 것은 나쁜 버릇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쁜 습관의 내면에는 나쁜 생각이 깊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쁜 습관의 원인이 되었던 일곱 가지 죄의 뿌리가 악습의 근원임을 알고 또 그 칠죄종이라는 가라지를 심어놓은 원흉이 마귀임을 알고 우리는 그 악습의 원인(예를 들어, 교만이 그 뿌리라면 교만)을 캐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칠죄종의 반대되는 향주삼덕과 사추덕(지, 의, 용, 절)중에 한 가지를 자기 안에 뿌리내려 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덕이 자리 잡고 성덕의 근원인 성령의 은총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감히 마귀가 다시 들어올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늘 우리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성사와 기도를 생활화하는 굳센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다짐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