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오늘은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고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입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13세기 위대한 신비가 성녀 ‘제르트루다’라고 불리는 독일 헬프타의 시토회 수녀로 신학적 섬세함과 신비적인 감수성, 그리고 지성과 감성이 조화된 영적 균형에서 비롯되어 ‘위대한 신비가’라고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1256년 1월 6일 독일에서 태어났고 만 5세 때 아이슬레벤에 있는 헬프타 시토회 수녀원 학교에 입학하였고 개방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지적 열망이 컸고 15세 때 교육을 마치고 수녀회에 입회한 뒤 베네딕토와 베르나르도 성인의 영성과 더불어 음악, 문학, 문법학, 예술 등에 능통했고, 특히 라틴어에 정통했습니다. 후에 영적생활에 더 나아가길 소원했고 1281년엔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에 의해 영적 평온을 되찾고 그분과의 일치 체험을 통해서 심오한 내적 상태에 들게 되었고 영적 신랑인 예수님과 결합된 영적 신부로서 예수님의 성심에 깊이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미사 도중 탈혼과 계시적 조명 그리고 사랑의 상처를 체험합니다.

성녀 제르트루다의 신심은 예수 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체험과 헌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성심을 공경하기 시작한 첫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대표적 성덕 중 하나가 ‘순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규율을 지키고 장상에게 복종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완전한 헌신을 완전한 순명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자신은 단지 하느님을 비추는 작은 촛불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겸손에 이르렀고 이는 곧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완전한 순명의 모범이신 성모님과의 일치를 통하여 죽기까지 성부께 순명하신 예수님의 순명과 일치로 이끌려 갑니다. 결국 그녀는 하느님 앞에서의 순명, 끝없는 헌신을 동반해 자기 자신이 완전히 없어지기까지 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1302면 11월 16일 세상을 떠나기 까지 약 4년 동안 병상에 누워 중병을 앓고 살았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했습니다. 그녀의 생애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기도자체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표지였습니다.

1) 김대건 신부 1845년 2) 최양업 신부 1847년 3)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 신부 1896년 4월 26일 서울 죽림동 약현성당에서 서품식 거행. 2637) 김학봉 신부

사도 성 요한은 사도들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두 차례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만 순교하시진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생을 마칠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단 한가지만 거듭거듭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시오.” 그리고 당신이 만일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실천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 예수님의 마음 속에 풍덩 빠져서 그분의 자비의 심연에서 사랑을 길어 올리는 것입니다.” 오늘 제 2독서 요한 1서 4장의 말씀 “서로 사랑하십시오.”입니다.

경제 논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마음을 닮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특히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는 경제논리랑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겠다고 99마리 양을 그 자리에 방치한 채 1마리를 찾아나선다느는 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잃은 양 한 마리, 상처 받고 고통받는 양 한 마리도 다 소중합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헤아리고 계시는 하느님! 단 한 사람도 당신의 사랑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마음, 비경제적인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쁨 = 하느님의 기쁨은 잃었던 양 한 마리를 찾는 기쁨,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여 멸망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받는 기쁨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찾는 우리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심성 중에 온유, 겸손을 배웁시다.

멕시코의 조용한 어촌에 휴가를 온 경영대 교수님이 아침 나절 배에서 고기잡이 장비를 거두고 있는 현지인 어부를 보고는 “안녕하세요?” “그런데 당신은 왜 이렇게 일찍 고기잡이를 끝냅니까?” 어부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식구 먹을 만큼 충분히 고기도 잡았고, 또 시장에 내다 팔만큼 여분의 양도 되기 때문에 일찍 끝내는 겁니다.” 하였다. “이제 집에가서 아내와 점심을 먹고, 오후엔 낮잠을 좀 자고, 아이들과 놀아줄 껍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빠에 가서 친구들과 테킬라 한 잔을 마시면서 기타연주를 할 껍니다. 나한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에 그 교수가 “내 말을 들어 보시오. 만약 오후 늦게까지 바다에 나가 있으면 당신은 지금보다 두 배나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분의 고기를 시장에 팔아 돈을 모을 수가 있고, 여섯 달~ 아홉 달 만에 이보다 더 큰 배를 구입할 수 있어요. 함께 일할 선원도 고용할 수 있고요. 그러면 당신은 지금보다 네 배나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한두 해만 지나면 두 번째 고깃배를 사고, 또 다른 선원을 고요할 자금을 갖게 될 것이오. 이 사업계획에 따르면 6~7년 안에 큰 어선 회사를 가진 자랑스런 소유주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억만장자도 될 수 있소.”

어부가 의아해 하면서 “교수님, 그런데 그 많은 억만금을 가지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모든 현금을 가지면 당신은 언제든지 은퇴할 수 있지요. 그러면 아무 걱정없이 삶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그림같은 어촌 마을에 별장을 한 채 사고, 날마다 아내와 점심을 먹고, 그 다음엔 아무 걱정없이 낮잠을 즐기는 거요. 오후에는 당신의 아이들과 충실히 놀아줄 수도 있고,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빠에 가서 친구들과 테킬라를 마시며 기타연주를 할 수도 있소!”

그러자 멕시코 어부가 “하지만, 저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데요?”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서로 사랑하며 삽시다. 큰 욕심 부리지 말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바로 작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즐기며 사는 자들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