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화 03082022
말씀터치2
2) 적은 치밀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제 마귀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 3).
여기서 우리는 마귀의 속성을 몇 가지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마귀는 항상 먼저 시비를 걸어온다는 것입니다. 괜히 와서 시비를 겁니다. 하와가 뱀을 찾아갔는가? 뱀이 하와를 찾아왔는가? 뱀이 하와를 찾아왔습니다. 마귀가 먼저 접근했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와서 하느님이 정말 그랬냐고 하와에게 의심을 품게 합니다.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IQ 낮은 마귀들이 하는 짓입니다. 당연히 하느님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니 “하느님이 말씀했지. 그런데 정말 했냐?”라고 물어봅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하느님이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창세 3, 1)라고 묻습니다. 다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다 먹되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많은 거짓을 약간의 진실에 버무려 섞어 넣음으로써 사람들을 속이는 것, 이것이 마귀의 속임수이며 꾀임입니다. 오만한 사람, 교만한 사람은 이 속임수에 다 걸려들고 맙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뒤이어 찾아오는 마귀의 방해를 경험하곤 합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없애려고 마귀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굳게 마음먹으면 곧 시험이 닥쳐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시험해서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둘째, 마귀는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 교묘하게 파고들어 옵니다. 우월감으로 인한 교만 혹은 자만이 있으면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열등감도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단식하신 것을 마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먹고 싶은 굶주린 상황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음식으로 유혹해 당장 끝장내리라고 판단하고 공격합니다. 그런 마귀를 시편은 “뒤에서 활을 쏘는 자”라고 했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서 활을 겨냥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혹은 마귀는 내가 길을 가는데,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웅덩이를 팠다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셋째, 마귀의 접근 방법은 사람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존심만 버려도 마귀에게 걸리지 않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모릅니다. 왜 서로 사랑하고 아껴줘야 할 부부가 부부 싸움을 하는가? 그릇을 깼다고, 돈을 잃어버렸다고 싸우지 않습니다. 무시했다는 것 때문에 싸우게 됩니다. 그릇 하나 깼을 뿐인데, 당신은 밤낮 그릇을 깬다고 하는 말에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밤낮 깼느냐며 싸움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냥 그릇 깼냐고 하면 간단한 문제를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존심을 버려야 사랑하는 것입니다. 좀 창피당하면 어떻고 좀 뭉개지면 어떻습니까?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실수하면 하는 것이고, 창피하면 창피한 것이지, 왜 그것을 감추려고 합니까?
마귀도 예수님께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면,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네가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인 것을 증명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며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 아니냐? 하느님의 아들이 배고프다는 게 말이 되냐? 당신이 돌로 빵을 만들면 다 해결될 거 아니냐?” 마귀는 이렇게 유혹합니다. 얼마나 그럴듯하고 얼마나 논리에 아주 잘 맞는 이야기입니까?
항상 기억하십시오. 논리에 맞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듯한 말, 합리적인 말에 속지 마십시오. 그것이 논리적이냐, 비논리적이냐를 묻지 말고, 그 말이 복음적이냐 아니냐를 물으십시오. 왜냐하면 복음은 논리를 뛰어넘고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기준을 ‘논리에 둘 것이냐? 복음에 둘 것이냐?’, ‘상식이냐? 말씀이냐?’, ‘합리성이냐? 하느님의 말씀이냐?’ 하는 갈등과 싸움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
지금 화가 버럭 나는데,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화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를 택할 것인가? 이때 말씀을 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이나 상황을 선택합니다. 또는 ‘하느님도 내 입장이 되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걸 하느님도 이해하실 거야.’라고 판단해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