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화 12072021
<회개의 시간이 은총의 시간이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유대 고사>에 의하면 유대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통치하던 로마제국의 빌라도 총독은 몇 차례에 걸쳐 양민들을 대량 학살을 했다고 전합니다.
기원후 35년 그리짐 산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고하게 대량 학살한 사건과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 때 쓰일 가축을 몰고 제사를 지내러 가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등이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건들을 평생 잊지 못할 참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 의해 자행된 사건은 아니지만, 실로암 저수지에 쌓은 탑이 무너져 18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도 그들은 잊지 못할 참사로 기억합니다. 마치 우리가 광주민주화항쟁,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사고, 천안함 사건을 비운의 참사로 기억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억울한 참사를 당한 피해자와 그 가족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희생을 당한 것은 바로 희생자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믿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그들을 더 곤혹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참사 외에 나병이나 중병에 걸린 경우도 그 병의 원인이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할 당시에도 육신의 고통을 받은 당사자나 가족들은 사회적인 몰이해와 냉대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하시고서도 “네 병이 나았다”라고 하는 것보다 “네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의미 깊은 말씀을 남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이 너희보다 더 죄가 많은 줄 아느냐?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5)라고 말씀하시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한 해 더 두고 본다. 혹시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 모른다.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릴 것이다”(마르 11, 14 참조)라고 말씀하시며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현세적 고통은 죄에 따른 대가라는 등식이 공식일 순 없습니다. 죄에 따른 결과의 시기와 모양은 인간의 셈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에 대한 최종적 결과가 두려운 병과 죽음이라면 병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회개가 생사의 갈림길인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유대인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3년을 예수님과 함께했지만 3년을 회개 없이 살았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받은 지 3년, 5년, 10년이 넘는 신자들은 시간이 더 주어진 다행스러운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시간을 더 주어도 회개하지 못하는 예수님 활동 당시의 유대인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이사 5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