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화 08082023 제6장. 성모님에 대한 레지오 단원의 의무 【성모님에 대한 참된 신심은 사도직의 의무를 요구한다.】
성모님에 대한 올바른 신심은 성모님과 일치함으로써만 성취됩니다. 곧 성모 님과 공동체를 이루는 삶을 뜻합니다.
성모님이 지닌 은총의 보화는 넘치고 있지만, 우리의 도움이 없이는 이 보화를 분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도움 없이는 성모님이 어머니의 역할을 다하실 수가 없습니다.
성모님은 협력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그 협력자입니다. 성모님의 손에 온전히 봉헌되고자 하는 착한 자녀들은 열렬히 환영받을 것입니다. 성모 님은 우리와 함께 어머니의 임무를 다하시길 갈망하고 계십니다. 미약하고 보 잘것없는 사람까지도 다 쓰시고자 하시는 성모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봉헌해 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고귀한 품성과 사명의 모든 것이 우리 삶 안에서 재현되도 록 정성을 다하여 사도직 활동에 착수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께 봉사할 때는 전력을 다하자】
성모님께 바치는 봉사는 최고의 품질이어야 합니다. 완벽한 활동으로 하느님 께 봉헌해야 합니다. 성모께 의존하는 만큼 그분께 드리는 선물도 최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단원은 사람들의 영혼을 영성적으로 풍부하게 구원하기 위하여 성모님과 공동 노력을 하는 참된 노력자입니다. 성모님과 단원은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해야 합니다.
활동 대상이 크거나 작거나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고 그 성패에 관계없이 최대 의 노력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해타산적인 태도는 레지오의 활동에서 금 물입니다. 성의없고 기계적인 행동은 육체적으로 피곤할 뿐이며, 영성적으로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건 성모님을 위하여 열심히 하면 성 모님의 전폭적인 협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셀기도회 훈화 08082023 오시는 분(대림 제2 주일 묵상) 하느님께 대한 호칭 – 『오시는 분』
성서에서는 하느님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시는 분”이라는 칭호입니다.
하느님은 오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 높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건네시고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오시는 그분을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지식과 열성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오시는 그분을 만나지 못하면 그 열성, 그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도 그러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세상 끝날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오신다고 가르칩니다. 기도와 성사, 말씀과 인간사를 통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성사를 받음으로써 오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할 때, 그리고 매일의 일과 사건을 통하여
오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하느님을 만나는 이 길을 일깨워줍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우리는 성서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과 만납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인내를 배우고 격려를 받아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아무쪼록 인내와 격려를 주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따라
모두 한마음이 되어 다 같이 한목소리로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주십니다.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인내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어려움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짓는 불의 때문이며,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인내와 격려로써
서로에게 못할 짓을 하는 죄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한마음이 되어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납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는 대림 제2 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냅니다만,
인권을 수호하는 것은 곧 신권을 수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
겉만 보고 재판하지 아니하고,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리라.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주리라.
그의 말은 몽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의 입김은 무도한 자를 죽이리라.”
오늘날 한국의 인권 상황은 너무 열악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하느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인간의 모든 일과 사건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기도나 성사를 통해서 내적으로 이루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허구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 받으러 오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을 보고 독설을 퍼붓습 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마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기도와 성사와 말씀뿐 아니라
모든 인간사에서 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오늘도 우리에게 오시는데
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만날 길이 그렇게도 많은데
왜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 그리도 부족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형식에 매달린 알맹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젯밥에만 정신이 팔린 기도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형식에만 매달린 성사와 전례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마음의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느님 모시듯 그렇게 형제들을 대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요한의 경고는 우리를 향한 외침입니다.
“그분은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죄는 아담이 서두른 데서 비롯되었고
내 소유욕은 그분에 대한 내 참된 사랑보다 더 강하다.
기다림! 아, 그 기다림의 고통! 그분의 부재에서 오는 공허!
그러나 나는 그분께서 그 공허 속에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분의 현존을 갈구했고 그분은 스스로를 부재로 현시하셨다.
나는 그분의 빛과 진리를 갈구했고
그분은 스스로를 암흑으로 현시하셨다.
따라서 나는 내 믿음을 정화시키고 그분에게
사리사욕에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당신을 믿노라고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까를로 까레또, 『오시는 주님』, 1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