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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교의 어떻게 탄생했나 

과거 한국교회에서는 성모 승천을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도 불렀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 승천(Ascension)과 달리 하느님에 의해 ‘올림을 받음’(Assumption)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리아의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에 부름을 받았다’는 성모 승천 교의가 선포된 것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발표하면서 였다. 비교적 근자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성모 마리아의 육신과 영혼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신약성서와 초대교회 문헌에도 직접적으로 언급돼 있지 않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사도 요한이 마리아를 모신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나 어디에서 생을 마쳤는지는 확실치 않다. 무덤의 소재나 유해에 대한 기록도 뚜렷하지 않다. 사망 시기도 ‘예수 승천이후 3일 후’ 혹은 ‘50일’ 등 추측이 다양했다. 그런 만큼 비오 12세의 회칙이 선포되기 전까지 성모 마리아의 승천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모 승천에 관한 언급은 4~5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으로 성모 승천에 대해 밝힌 인물은 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니오(315~403)로 알려진다. 그는 성모 승천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하느님 흠숭과 성모 공경을 구별하면서 지나친 성모 신심을 경고했다고 한다. 당시는 성모 공경과 신심이 매우 활발했던 상황으로 ‘성모의 죽음’ ‘성모의 장례식’ 등 제목의 문헌들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됐다. 이 기록들에는 마리아의 예루살렘에서의 사망, 승천 내지 죽은지 3일 후 부활했다는 이야기들이 수록됐다. 이외 4~5세기경 쓰여진 예루살렘의 디모테오 설교 사본에서도 성모 마리아가 육신과 영혼이 승천했다는 신앙 고백을 발견할 수 있다.

서방교회에 성모 승천 교의가 공식화 된 것은 투르의 그레고리오(538~594)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멜리토의 저작 사본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였다. 동방교회에서는 크레타의 안드레아(660~740) 등이 쓴 논술 ‘하느님의 명칭들’에서 성모 승천을 증언하는 몇몇 구절들이 발견된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제르마노(634~~733)의 작품들과 7세기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도 당시 신자들이 성모 승천 교리를 받아들였음이 증언되고 있다.

요한 다마세노(655~750)의 강론 역시 성모 승천 교리에 대한 교회 초기의 전승을 엿볼 수 있다. 즉 마르치아누스 황제(396~457)와 풀케리아 황후가 예루살렘의 세례자 유베날리스에게 성모의 시신을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성모가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콘스탄티노플 근처 발케르네에 경당을 세웠다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과 관련하여 신학적 근거가 세워진 것은 8~9세기경 아우구스티노의 서한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대 알베르토(1296~1280),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보나벤투라(1217~1274), 교황 베네딕토 14세(1740~1758)에 의해 성모 승천 교의가 재확인 됐고 이러한 작업들을 바탕으로 1870년경부터 성모 승천 교의가 공식화 돼야 한다는 요청들이 제기됐다.

1854년 12월 8일 발표된 교황 비오 9세의 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으로부터 확정된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는 성모 승천 교의를 선포하는데 보다 큰 밑 배경이 됐다.

비오 9세의 교서 후 로마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육체적인 승천도 교의로 규정돼야 하고 공포돼야 한다는 요청들이 쇄도했고 제1차 바티칸공의회로부터 1941년까지 수많은 이들이 그같은 교의 선포를 건의했다.

113명의 추기경, 300명 이상의 대주교와 주교들, 3만2천 명 이상의 사제와 남자 수도자들, 5만 명 이상의 여성 수도자와 800만 명 이상의 평신도들이 건의자에 포함됐다.

마침내 교황 비오 12세는 1946년 가톨릭 세계 모든 주교들에게 설문지를 보냈다. “존경하올 형제 여러분, 귀하께서는 성모님의 육적 승천을 우리의 신앙 교의로 규정하고 선포해도 좋은지 지혜와 슬기를 다하여 잘 판단하시기 바라고, 여러분이 거느린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를 원하는지 응답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설문지의 답변 결과는 ‘거의 만장일치’로 발표됐고 마침내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11월 1일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성모 승천 교의를 반포하기에 이른다. 이 부분에서 성모 승천에 관한 교의가 교황이 주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자들 건의와 청원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눈여겨 볼만 하다.

그러나 한편 교회사학자 이냐시오 될링거와 교부학자 요한 에른스트 등은 교황의 무류지권과 관련, 성모 승천 교리의 선포를 반대했던 인물들로 알려진다.

이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성모 승천과 관련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받으셨다. 이로써 마리아는 다스리는 자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을 더욱 완전히 닮게 되셨다”(교회 59항)고 천명했다.

 ▲ TIZIAN VECELLIO 작, ‘Himmelfahrt Maria’.

성모 승천 대축일은 왜 8월 15일인가

이 대축일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4세기경 안티오키아에서 시작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으로 축일이 기념된 곳은 5세기 초 예루살렘에서 였다. 조베날레 주교(422~458) 시대에 예루살렘 근처 카티스마에 세운 마리아 성지의 봉헌 기념일, ‘하느님의 어머니’ 축일이 8월 15일이었던 데서 유래됐다는 것이 설득력 있다. 이날은 후에 성모 무덤 성당에서 기념되다가 6세기경 명칭이 ‘성모 안식축일’로 바뀌었다. 황제 마우리치우스(582~602)는 제국 전체가 이 축일을 지내도록 선포하기도 했다.

로마에 축일이 받아들여 진 것은 페르시아 침력으로 피란 왔던 동로마 제국내 수도원들 영향으로 추측된다. 교황 세르지오(683~701)는 여타 성모 축일에서처럼 행렬을 하도록 권함으로써 축일이 더욱 성대해지는데 기여했고 교황 레오 4세(847~855) 때는 팔부 축일로 지정됐다.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는 부활 대축일, 성탄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 등과 같이 대축일로 기념하도록 했다. 중세 때 특히 남부 유럽 지역에서는 이 축일을 기해 첫 수확물들에 대한 축복이 이뤄졌다고 한다.

서방교회에서는 16세기의 ‘로마 성무일도’에 성모 승천 팔부 축일을 삽입했다. 1970년 미사 경본 개정에서 성모 승천 축일은 전야 미사가 인정된 유일한 마리아 축일이 됐다.

전문가들은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미래를 보여준 것”으로 표현한다. 교회의 모상인 성모가 하늘에 올림 받음을 보면서 “마리아 안에서 완성될 구원의 업적을 보고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는 “원죄없는 잉태가 구원의 첫 열매인 성모 마리아 신비의 출발점이라면 하늘에 올림을 받은 ‘승천’은 성모 마리아 신비의 종착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