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12, 28ㄱㄷ-34)

사순 제 3주간 금요일 강론 (복음: 마르 12, 28ㄱㄷ-34)

찬미 예수님!

형제 자매 여러분! 코로나 바이러스19로 많은 어려움과 고통,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은총을 청하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도움의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부디 힘과 용기를 잃지 않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또한 주님께 신뢰와 의탁을 지니고 희망 가운데 나아갑시다.

옛 성현의 말씀에 『지소선후(知所先後)하면, 즉근도의(則近道矣)라!』 는 말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깨닫는다면, 그는 곧 도에 가까운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사 모든 이치의 본질, 바탕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밑바탕에 있습니다. 가장 큰 도(道), 곧 깨달음은 사랑에 관한 깨달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는 말씀을 알아야 세상의 이치가 이해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먼저 생각하고 우선시하고 앞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가치의 우선순위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아버지가 자기의 인격 자체로서 인정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자기 자녀들을 통하여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당신 피조물인 인간으로 말미암아 사랑받고자 하십니다. 그분은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베푼 것을 당신 자신에게 베푼 것으로 인정하실 정도로 당신과 인간을 결부시키십니다.

형제애(愛人德)는 하느님 사랑(愛主德)의 연장입니다. 그리고 이 이웃 사랑의 덕은 모든 인간을 그들의 아버지요 조물주이신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순전히 인간적인 것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애덕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그가 날 좋아하기 때문에, 내게 잘 해주기 때문에 이런저런 장점 때문에, 불쌍하니까 등등의 이유로 그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적인 사랑, 박애주의는 될지언정 애덕(愛德)은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 46)

본성적으로 싫은 사람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상대방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볼 줄 아는 신앙이 있으면 본성적으로 싫은 사람도 초자연적 애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책임자는 신앙이 약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판단하고 이러저러한 조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덕의 출발점은 ‘내 탓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애덕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애아심(愛我心) 내지 이기심(利己心)’입니다.

『상사문도(上士聞道)면 근이행지(勤而行之)하고, 하사문도(下士聞道)면 대소지(大笑之)라.』 는 옛말이 있는데, 그 뜻은 『훌륭한 사람이 도를 들으면 그대로 행하고, 인격이 낮은 사람이 도를 들으면 비웃는다.』입니다.

구약성서 중 미가서에서는 참으로 복되게 사는 길을 세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정의를 실천해라. 2) 기꺼이 덕에 보답하라. 3) 조심스럽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라.(미가 6,8)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 행복이요, 참사랑이다.

하느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체험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 영혼과 육신이 지쳐있는 벗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때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오직 관계성 안에서만 그 실체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하느님과 이웃이죠.

제주도 이시돌(목장)에서 50년 동안 사목하셨던 아일랜드 출신의 임피제 신부님의 금경축 미사에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큰 사업을 번창시킬 수 있었습니까?” 신부님은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하느님께 사랑을 돌려 드려야 하는데,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잘 사랑하며 삽시다. 사랑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 행복이요, 참사랑이다.

하느님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체험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 영혼과 육신이 지쳐있는 벗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때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 관계 속에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오직 관계성 안에서만 그 실체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하느님과 이웃이죠.

제주도 이시돌(목장)에서 50년 동안 사목하셨던 아일랜드 출신의 임피제 신부님의 금경축 미사에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큰 사업을 번창시킬 수 있었습니까?” 신부님은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하느님께 사랑을 돌려 드려야 하는데,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잘 사랑하며 삽시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