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팔일축제 화요일 강론(김 바오로 신부)
“Errare humanum est”(에라레 후마눔 에스트) 라는 라틴어 격언은 “인간은 실수하는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언제까지나 실수를 거듭 거듭하며 실패한 인생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 속에서 해야 할 숙제(과제)가 있습니다.
오늘 제 1독서 사도행전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픈 이들이 사도들에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하였습니까?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라고 말하죠!
해답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잘못된 것을 철저히 반성하여 바로 잡아 바른 인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
회개하지 못하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루카 10, 13-15).
회개와 더불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 곧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토록 듣고 싶던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봅니다.
“마리아야!”하고 부르시는 예수님!
“라뿌니!”(스승님)하고 대답하는 마리아!
처음에는 그토록 바라던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그저 무덤이라고 하는 드러난 현상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현상 너머에
부활하여 새로운 실존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분! 새로운
세계,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의 영광의 세계로 건너가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성령을 받아서 새로워진 눈과 귀로 세상을 보고 들어야 합니다.
이제 부활 후의 예수님은 더이상 육신의 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우리 또한
소멸해 버릴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영(성령)을 맞아들이고 사랑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이 하느님의 승리에 우리가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사랑이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부활은 철저하게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아온 예수님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를 흡족하게 하고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었기에 아버지도 부활을 통하여 아들의 영광을 드러낸 사건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징표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십자가에서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부활로써 성공한 인생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성 론지노(3월 15일이 축일)>는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백부장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후에 군인 생활을 포기하고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론지노는 수도 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박해를 겪게 되었습니다. 집정관은 그의 이를 뽑고, 혀를 잘랐으나, 그의 설교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도끼를 들고 이방인의 신상들을 때려 부수며 “이게 무슨 신이람.”하고 외쳐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집정관은 그를 즉석에서
참수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론지노의 유해는 만투아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마르 15, 21) “주님 안에서 선택을 받은 루포스,
그리고 나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그의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로마 16, 13)라고 사도 바오로가 편지에 쓴
인물입니다. 루포스는 사도 바오로의 문안을 받을만한 인물이었고, 전승에 따르면 동방교회의 주교로 봉사하였다고 합니다.
부활은 경험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사건이요,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실 때야 비로소 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죄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회개하여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웃을 사랑하길 바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사도 3, 6-7)
이 부활시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길 바라신다면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하는 삶을 사시고, 하느님과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면 어떨까요?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