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코로나19로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한 특별기도” 강론

(2020년 3월 27일)

복음 (마르 4,35-41)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강론전문

“그날 저녁이 되자”(마르 4, 25). 우리가 조금 전 들은 복음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미 몇 주 전부터 저녁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짙은 어두움이 우리 광장과 길거리와 도시를 덮고 있고, 우리의 삶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침묵으로 가득하고 고통스러운 공허감 속에 짓눌려 있으며 지나가는 모든 것을 멈춰 세워버렸습니다. 이런 암울한 분위기는 숨 쉬는 공기 속에서조차 느껴지고, 사람들의 몸짓 안에도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빛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하며 길 잃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거센 파도에 사로잡혀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연약하고 길 잃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모두 함께 노를 저어야 하고, 서로를 격려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는 중요하고도 절실한 사실 또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배 위에 … 우리 모두가 함께 있습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38절)라고 걱정하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없고, 오로지 모두가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어렵지 않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제자들이 놀라고 낙담한 것은 당연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배의 제일 뒤쪽 고물에 계셨습니다. 그 부분은 제일 먼저 물에 가라앉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폭풍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시면서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네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 바람과 물결을 멎게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꾸짖는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

우리 모두 이 사건의 의미를 찾아봅시다. 예수님의 믿음과 대비하여 볼 때, 제자들의 믿음에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께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청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38절) ‘당신은 저희가 어떻게 되든 간에 아무 상관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관심이 없어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으신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서 또한 가족들 사이에서 누군가 “당신은 저에게 아무 관심도 없나요?”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이 말은 마음에 상처를 주고 돌풍이 일게 만드는 표현입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제자들의 말에 흔들리고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다른 누구보다 우리를 아끼고 돌보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한번 예수님께 간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낙담한 제자들을 구해주셨습니다.

폭풍은 우리의 상처받기 쉬운 약한 내면의 가면을 벗기고 거짓되고 과장된, 이른바 확실한 것들의 민낯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것들 안에 우리는 우리의 일상의 삶과 계획, 우리의 습관과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 살았습니다.  폭풍은 그동안 우리의 삶과 우리의 공동체에 영양분을 주고 유지시키고 강화시키는 참된 것들을 우리가 얼마나 무심히 죽게 하고 단념해 왔는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폭풍은 우리 백성의 영혼을 살찌우는 것을 잊어버리고 겉만 포장하는 온갖 시도들을 드러냅니다. 외형적으로 우리를 “살리는(구원하는) 도구”라고 여기며 이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 안에서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모든 시도들은 우리가 근원을 향해 나아갈 능력을 앗아가고 우리의 조상들의 성찰을 기억하는 능력을 없애어 우리가 역경에 맞서는데 필요한 면역력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갑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우리의 “자아”(ego)를 위장하고 있던 고정관념의 허울이 폭풍과 함께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복된) 공동의 소속감,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형제자매로서의 소속감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주님, 오늘 저녁 당신의 말씀이 저희 마음에 와 닿고 저희 모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희보다 훨씬 더 사랑하시는 이 세상 안에서 저희는 강한 척하며 마치 불가능을 모르는 듯 전속력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익을 탐하며 세상사에 휘말리고 서두르다가 방향을 잃고 끌려 다녔습니다. 당신께서 경고하실 때 저희는 멈추지 않았고, 전쟁과 세상을 뒤덮은 불의 앞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가난한 이들과 깊게 병든 우리 지구가 지르는 비명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병든 세상을 개의치 않고 우리는 언제나 건강하게 잘살 것이라 생각하면서 계속 달려왔습니다. 이제 폭풍의 바다에서 당신께 간절히 청합니다. “주님, 잠에서 깨어나소서!”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주님, 당신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은 당신의 존재를 믿으라는 말씀이라기보다 당신께 다가오라는 말씀이고 당신께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순 시기에 주님의 긴급한 부르심이 울려 퍼집니다. “회개하여라!”,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 12). 이 시련의 시기를 선택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도록 저희를 불러주십시오. 당신께서 심판하시는 시간이 아니라, 저희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지나가는 것인지 선택하고, 정말 필요한 것에서 그렇지 않은 것을 떼어내는 판단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지금은 당신과 이웃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다시 정향하고 당신을 따르는 시기입니다. 저희는 인생여정에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목숨을 바쳐 응답한 수많은 길벗들의 모범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용기와 헌신 안에 채우고 빚어내시며 활동하시는 성령의 힘입니다. 이것은 구원하시고 인생을 값지게 만들어주시는 성령에 따른 삶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이 평범한 사람들 – 종종 우리는 이들을 잊어버립니다 – 과 함께 엮여 있고 그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신문이나 잡지의 머리기사를 장식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최신의 쇼 프로그램이나 거창한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아닙니다. 의사, 간호사, 슈퍼마켓의 직원, 미화원, 간병인, 운송서비스 종사자, 사법 및 치안 당국자, 자원봉사자, 사제, 수도자,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아무도 혼자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백성들의 진정한 발전이 어떤 것인지 재평가하도록 하는 큰 고통 앞에서 저희는 “저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라고 하느님께 청하신 예수님의 사제의 기도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일매일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공포심 대신에 공동책임의 씨를 뿌리려 애쓰면서 희망을 나누어주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선생님들이 우리 자녀들에게 몸에 밴 습관을 바꾸어가며 시선을 들어 올려 간절히 기도하면서 일상에서 작은 몸짓으로 위기를 감당하고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모든 이들의 선을 위하여 자신을 봉헌하며 중재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기도와 묵묵한 봉사. 이것이 우리가 이 재난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가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곤경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먼 옛날 항해사들에게 별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인생의 배 안으로 주님을 초대합시다. 온갖 두려움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그분께서 그것들을 물리치시게 합시다. 제자들처럼,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으면 조난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심지어 추악한 일들조차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돌풍을 잠재우고 평온함을 가져다주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폭풍우 속에서 우리를 다시 깨어나게 하시고 모든 것이 엉망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때에 용기와 도움을 주고 이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연대하고 희망을 전하는 일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살려내시기 위해 잠에서 깨십니다. 우리에게는 닻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구원되었습니다. 우리는 키도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속량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치유되었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도록 그분의 품에 안겨있습니다. 격리된 채, 따뜻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서로 만나지 못하는 고통과, 많은 것이 부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 번 더 우리에게 울려오는 구원의 선포를 들읍시다. 그분은 부활하셨고 우리 곁에 살아 계시다는 구원의 선포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재발견하고 우리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안에 깃든 은총을 깨닫고 든든히 보존하여 더욱 키워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마십시오”(이사 42, 3 참조). 그 불꽃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의 불이 다시 타오르게 하십시오.

그분의 십자가를 품에 안는다는 것은 현재의 온갖 어려움을 끌어안을 용기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의 감도에 따라서만 얻을 수 있는 창조성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능력과 소유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잠시 접어둘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또한 모두가 함께 불림 받았음을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형태의 환대와 형제애와 연대를 채워 넣을 빈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찾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 희망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와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화하고 유지시켜야 합니다. 희망을 품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두려움에 해방하고 희망을 선사하는 믿음의 힘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베드로 사도의 바위 같이 굳은 믿음을 상징하는 이 자리에서, 오늘 저녁 저는 당신 백성의 안위이시며 폭풍 속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 전구하며 여러분 모두를 주님께 맡겨드리고자 합니다. 로마와 온 세상을 품고 있는 이 기둥들로부터 하느님의 축복이 위로의 포옹처럼 여러분에게 내리시기를 빕니다. 주님, 이 세상을 축복하시고 육신의 건강을 주시며 마음의 위안을 주십시오. 저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저희는 믿음이 약하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희를 돌풍의 회오리 속에 버려두지 마십시오. 다시 한 번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28, 5)고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베드로 사도와 함께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 모든 걱정을 당신께 내맡깁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베드 5, 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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