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순교자 대축일>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께 대한 충성의 삶」
“순교자들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다.” 라는 떼르뚤리아노 사제의 말씀처럼 수많은 한국 순교자들의 피 위에 신앙의 꽃이 피어 신부님의 뒤를 잇는 방인사제가 4000명이 넘게 탄생하였고, 신자들도 500만 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김대건 신부님과 훌륭한 신앙선조들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2013년 4월 저는 신부님이 마카오 유학 기간 중 마카오에 두 차례 민란이 발생했을 때 피난 가셨던 마닐라 북쪽에 있는 <롤롬보이>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당시에는 성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별원)이 있었는데 김대건신부님은 1839년 8월 그 피난처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의 편지를 받으셨습니다. 그 해 9월 26일 신부님의 부친 김 이냐시오께서 순교하셨으니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였을 것입니다.
김대건 신학생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망고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시며 어서 빨리 사제가 되어 조선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열망을 가지셨을 겁니다. ‘지금 나는 어떤 열망을 지니며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물음입니다.
우리나라의 신앙의 선조들은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기며”(로마5,2) 사셨습니다. “환난도 자랑으로 여기며”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영광만을 찾으며 환난을 피하고 안락함만을 추구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 신앙선조들의 역사를 보면 순교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교자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증거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증거자도 있습니다. 이웃사랑을 외면하는 것,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 기도에 충실하지 않는 것, 주일을 거룩히 지내지 않으며 봉헌과 나눔의 삶을 살지 않는 것도 신앙의 역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역증거는 주님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제1독서의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2역대24,20)는 말씀은 믿음을 증거하며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순교행위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생명의 하느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음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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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김대건 신부님의 편지는 신앙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베르뇌 신부님, … 안녕히 계십시오. 오래지 않아 천국의 영원하신 성부님 대전에서 모두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내 가장 사랑하는 형제 (최양업) 토마스, 잘 있게. 우리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감옥에 갇힌 나는, 그분의 권능에 나 자신을 의탁하여, 천주께서 나로 하여금, 악형 중에 용감히 항구하도록 붙들어 주시기를 바란다네.”
이 땅의 복음화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온 생애를 봉헌하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당신의 후배들인 저희 사제들이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될 수 있게 도와주소서!
마르튀리아(희) = 증거라는 뜻인데 나중에는 순교를 뜻하는 말로도 쓰임.
증거 + 희생
무엇이든지 증거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증거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써 사랑과 용서, 자비의 하느님이심을 증거 하셨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
1821. 8. 21.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솔뫼마을에서 탄생하심. 1846년 9월 2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심.
“오늘 죽음을 맞는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라고 하신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합니다. 박해시대에 조선 교우들에게 희망이었던 김대건 신부님은 불과 7개월 남짓 활동하시고 6개월은 감옥에 갇혀 계시다가 순교하십니다.
취조하던 형리들이 그 재능이 아까워 하늘의 임금을 배반하기만 하면 조정에 품하여 큰 벼슬을 얻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새남터 백사장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
소년 김대건의 영특함에 모방신부는 15세의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 세 소년은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함. 산설고 물설고 낯설고 음식도 맞지 않는 낯선 곳에서 병마와 싸우며 힘겹게 공부를 하고 친구 최방제는 병마와 싸우다 먼저 하느님께 갑니다. 풍토병, 영양실조, 풍랑, 민란으로 목숨의 위협을 당함.
1844년 부제품을 받고 조선으로 귀국 국내상황을 살피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서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됨. 조선에 서둘러 들어와 전도했으나 박해가 너무 심함. 혼자 힘으로 성무집행이 어려워 중국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청하러 가다가 1846년 6월 5일 순위도 앞바다에서 체포됨.
여러 외국어와 지리에도 능통하여 감옥에 있으면서도 지도를 그려주고 번역해 줌. 그 능력에 감탄하고 아까워 한 조정은 좋은 집, 높은 관직, 예쁜 부인을 맞게 해주겠다 유혹했으나 회유책을 거절하고 순교의 길을 가심.
1846년 9월 26일 새남터에서 순교.
“나의 영원한 생명을 이제 시작합니다.”
신자들은 죽어서 백사장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신부님의 시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경비병에게 술을 사주고 잠이 든 뒤에 시신을 파내어 미리내까지 메고 갔습니다. 10월 26일 시신을 메고 새남터 출발. 10월 30일 미리내 도착하여 안장함.
증조부 김진후는 지방관료로 남부럽지 않게 생활했으나 50세에 세례를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함. 그러다 1814년 2월 20일 체포되어 순교함.
조부 김택현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고 우술라와 결혼 솔뫼에 살다가 1839년 9월 26일 체포되어 순교함. 할아버지가 순교했으니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남편잃은 우술라는 아이를 데리고 경기도 골배마실로 이사를 감.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함. 천주학쟁이 천덕꾸러기 과부로 힘겹게 살게 됨. 모방신부가 골베마실을 방문하여 김대건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함.
“너희는 나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순교는 그리스도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며 기적이다. 순교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그리고 가장 확실히 따를 수 있는 영광의 길이다.